로베르 두아노, 사진이 남긴 낭만의 이야기
낭만을 떠올리게 한 한 장면
얼마 전 KBS 〈다큐멘터리 3일〉 안동역 편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10년 전, 우연히 마주한 사람들이 “2025년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안동역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킨 이야기였죠. 오랜 세월을 건너 다시 만나는 그 순간을 보며 우리는 ‘낭만이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저는 그 장면에서 자연스럽게 프랑스 사진작가 로베르 두아노를 떠올렸습니다. 그는 파리의 거리에서, 소소한 약속과 우연한 만남 속에서 낭만을 발견해낸 사람이었으니까요.
인간주의 사진가, 로베르 두아노
로베르 두아노(Robert Doisneau, 1912~1994)는 파리 근교에서 태어나 예술 학교에콜 에스티엔(École Estienne)에서 석판 인쇄와 타이포그래피를 공부했습니다. 일찍 부모를 잃고 외가에서 자란 그는 내성적인 성격 탓에 처음에는 사람보다 거리의 표지판, 자갈길 같은 풍경을 찍으며 카메라에 익숙해졌습니다.
1930년대에는 르노 자동차 공장에서 산업 사진사로 일했지만, 곧 거리로 나와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기록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그는 보그(Vogue)와 라이프(Life) 같은 잡지에서 활동했지만, 화려한 패션보다 파리의 골목과 시민들의 웃음에서 더 큰 매력을 느꼈습니다.
두아노는 자신을 ‘인간주의 사진가(Humanist Photographer)’라 불렸습니다. 그는 “뉴스가치보다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사진이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그의 사진에는 따뜻한 눈빛, 아이들의 웃음, 카페의 연인들이 담겨 있었고, 그것이 곧 ‘낭만’의 기록이 되었습니다.
전쟁과 저항 속에서 피어난 낭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파리는 독일군의 점령 아래 있었습니다. 두아노는 단순한 사진가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위조 신분증과 문서를 만들어 레지스탕스를 도왔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신분증을 내어주어 한 폴란드 피난민의 목숨을 구했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죽음을 무릅쓴 용기였지만, 그는 “도울 수 있다면 기꺼이 행동했다”고 담담히 말했습니다. 그의 사진이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전쟁 속에서도 인간애와 연대를 담아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두아노의 사진에서 느껴지는 낭만은 단순히 사랑스러운 장면의 기록이 아닙니다. 그것은 절망적인 시대에도 ‘인간다움’을 지키려는 태도에서 피어난 낭만이었습니다.
연출과 우연 사이 – 《호텔 드 빌 앞의 키스》
로베르 두아노의 대표작, 〈호텔 드 빌 앞의 키스〉(1950)는 파리 시청 앞에서 한 연인이 입을 맞추는 장면을 담았습니다. 이 사진은 전 세계적으로 ‘낭만의 파리’를 상징하는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장면은 우연이 아닌 연출이었습니다. 두아노는 배우 지망생 커플을 섭외해 파리 거리 곳곳에서 키스를 부탁했고, 수많은 사진 중 가장 자연스러운 장면을 골라냈습니다. 그럼에도 이 사진이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연출과 상관없이 “낭만을 믿고 싶은 마음”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두아노는 “연출된 사진이라도 관객이 이야기를 완성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사진은 열린 이야기이고, 낭만은 보는 사람의 마음 속에서 완성된다는 것이죠.
유머와 일상의 발견
두아노의 사진에는 낭만만 있는 게 아닙니다. 그는 일상 속 유머와 장난기를 즐겨 담았습니다.
예를 들어, 〈피카소와 빵〉(1952)에서는 위대한 화가 피카소가 거대한 바게트를 손처럼 들고 있는 모습을 포착했습니다. 또 한 남자가 비에 젖지 않도록 우산 대신 첼로 케이스를 꼭 끌어안는 장면은, 음악과 삶을 동시에 사랑한 파리 시민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이처럼 두아노의 사진은 “평범한 순간의 특별함”을 일깨워줍니다. 누군가에게는 스쳐 지나가는 장면이, 그의 카메라에서는 낭만이자 이야기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
오늘 우리는 스마트폰으로 언제든지 사진을 찍습니다. 하지만 두아노가 남긴 메시지는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는 일상의 경이로움은 흥미롭다. 영화 감독도 거리에서 만나는 뜻밖의 순간을 연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웃는 아이, 커피를 마시는 연인, 길거리 연주자의 노래. 이런 장면에서 발견하는 낭만은 오늘날에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앞서 언급한 ‘안동역 약속’처럼, 특별하지 않아 보이는 순간도 시간이 지나면 큰 감동과 낭만이 됩니다. 결국 낭만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 곁의 일상 속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낭만을 바라보다
로베르 두아노의 사진은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삶을 낭만적으로 바라보는 태도” 그 자체입니다.
그가 파리의 거리를 거닐며 발견했던 작은 행복처럼, 우리 역시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면 낭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래된 약속을 지키려는 마음, 전쟁 속에서도 인간애를 잃지 않는 용기, 그리고 평범한 하루 속의 웃음.
이 모든 것들이 두아노가 남긴 가장 소중한 유산이자, 우리가 오늘 다시 바라봐야 할 낭만아닐까요?
📌 참고 출처
- France24 – Robert Doisneau, the wartime years: Spirit of resistance (2023) → https://www.france24.com/en/france/20231015-robert-doisneau-the-wartime-years-paris-show-hails-photographer-s-spirit-of-resistance
- CelloMuseum – The Photographer and the Cellist: Doisneau (2021) → https://cellomuseum.org/the-photographer-and-the-cellist-doisneau-and-baquet/
- Smithsonian Magazine – The Kiss by the Hôtel de Ville → https://www.smithsonianmag.com
- Times of India – Revisiting a Promise: The Nostalgic Reunion at Andong Station (2025) → https://timesofindia.indiatimes.com/web-series/news/korean/revisiting-a-promise-the-nostalgic-reunion-at-andong-station-in-documentary-3-days-special/articleshow/123452435.cms
- https://www.robert-doisneau.com/en/